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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주말이라는 핑계로 네가 잔뜩 늦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 정도. 묘하게 들뜬 기분으로 아침을 준비했다. 왠지 예감이 좋은 하루였다.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인데 정말 좋은 일이 벌어진 것처럼 콧노래가 나왔다. 어쩌면 침실 문을 열고 나오는 옅은 기척 때문일까. 잘 잤어, 자기야? 묻는 말에는 아직 졸음 섞인 웅얼거림만이 돌아왔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이어 쏴아아,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또 온수 보일러 트는 걸 까먹었겠지? 하지만 이 김남준이 처리했으니 안심하라고. 이토록 너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가슴이 뛰었다. 혼자 벅찬 가슴을 부여잡다가 버터 둘러 굽던 토스트 뒤집는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버렸지만. 으, 아까워. 한쪽 면은 완벽에 가깝게 구워진 터라, 거무스름하게 탄 뒷면이 더 아쉬웠다. 그래도 탄 걸 네게 먹일 수는 없지. 하지만 난 먹어도 솔직히 별로 상관은 없는데, 그러니까 탄 부분만 좀 긁어내고 먹으면… 괜찮지 않을까? 짧은 고민 끝에 쓰레기통으로 가던 길을 틀어 식탁 위 접시에 토스트를 올렸다. 음, 좋아. 지금 완전 알뜰왕 살림꾼 애인이야. 완전 일등 신랑감이지? 또 혼자 백 보 정도 앞서나간 상상을 하다가 간신히 현실로 돌아왔다. 토스트를 하나 더 굽고, 계란 푼 것에 소금과 우유를 더해 스크램블을 만들었다. 미리 씻어서 물기를 빼둔 양상추와 어린잎 채소를 풍성하게 쌓고 드레싱을 후루룩 뿌려 간단히 만든 샐러드까지, 제법 그럴싸한 아침 식사가 마련되었다. 이제 잼을 꺼내야지, 새로 산 블루베리 잼을 어디에 뒀더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포옥, 촉촉한 온기가 등을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주욱 올라갔다. 
 
 새로 바꾼 바디 워시는 향이 상쾌했다. 최근 네 몸 곳곳에 드문드문 올라온 붉은 발진을 보자마자 사온 것이었다. 병원에 가자고 했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별 거 아니니 괜찮다고, 오버 좀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은 탓에 이 정도밖에 할 수가 없었다. 민감성 피부에 좋고, 아기도 쓸 수 있을 정도로 성분이 순하고, 아토피나 알레르기 환자들 사이에서 간증이 쏟아지는 일명 구원템이고, 무슨 리뷰 어플에서 몇 년 연속 별점 일 위를 차지했고, 어쩌고저쩌고 발로 뛰고 인터넷을 뒤져 가며 찾아온 정보를 거의 영업 사원처럼 쏟아놓으며 이제부터는 꼭 이걸로 씻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더니, 착하게도 제 말을 순순히 따라준 모양이다. 귀여워. 진짜 귀여워. 어떡해, 너무 좋아. 속으로 떠는 주접을 숨기며 태연한 척 좋은 아침, 인사말을 건넸다. 쭌도, 좋은 아침, 하암. 하품을 하며 등에서 멀어지는 온기를 붙잡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왜냐면 나는 지각 있는 젠틀하고 성숙한 애인이니까. 음, 그렇지. 그런 설정이지, 나는. 별 웃기지도 않는 생각을 하며 마침내 찾아낸 잼 뚜껑을 땄다. 뒤에서 바삭,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잼도 발라서 먹지, 어?"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에 조금 당황해버리고 말았지만. 

 너는 토스트를 별 표정도 없이 오물오물 씹어 삼키고는 또 한 입을 베어 물었다. 그런데 네 몫으로 예쁘게 플레이팅 해놓은 쪽이 아니라.
 
 
 "…자기야, 그걸 왜 먹고 있어?"
 
 
 한쪽이 까맣게 탄, 보기만 해도 입속에 쓴맛이 퍼지는 망친 토스트를, 내가 내 몫으로 대충 덜어둔 쪽을.

 그런데도 너는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고개만 갸웃하며 나를 돌아본다. 왜, 이거 쭌이 찜해둔 거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던 네가 중얼거렸다. 별 맛도 안 나는데, 뭐 먹으면 안 되는 거 먹은 것처럼 민망하게……. 그러면서 토스트를 다시 접시에 내려놓는데, 그제야 제가 보지 못한 면이 눈에 띄었는지 어, 당황한 소리가 짧게 터져 나온다. 
 
 
 "이거… 탄 거였네?"
 "응, 실수로 한쪽을 태워서 그쪽만 긁어내고 내가 먹을까 했던 건데… 먹으면서도 몰랐어?"
 "탄 맛이 안 나서……."
 
 
 그럴 리가 없다. 그래도 네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혹시나 싶은 마음에 남은 토스트를 한 입 먹어 보았다. 역시 쓰다. 탄 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이걸 모를 리가 없는데, 대체 어째서?
 
순간 머릿속에 이상한 가설이 하나 떠올랐다. 토스트는 분명 탄 맛이 난다. 하지만 너는 탄 맛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네가 맛을 느끼지 못할 수밖에 없는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이렇게 잔뜩 탄 음식 맛을 보고도 이상한 걸 눈치 채지 못했다면, 멀쩡한 음식의 맛도 못 느낄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닌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멀쩡하게 구워진 토스트에 잼을 발라 건넸다. 이걸로 먹어봐, 새로 산 잼 발랐어. 맘에 들면 더 사게, 맛이 어떤지 알려줘. 그냥 또 내가 호들갑을 떠는 것뿐일 거라고, 너의 일이라면 정도를 모르는 내가 또 오버를 하는 것뿐이지, 이상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수십 번을 되뇌며 떨리는 목소리를 감췄다. 너는 내가 건넨 토스트를 받아서 한 입을 물고는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블루베리?"
 
 
 아, 역시. 주책바가지 애인의 괜한 걱정이었군. 다행이야. 안도감에 심장이 한순간에 푹 바람이 빠졌다. 나는 순간의 쓸데없는 불안을 숨기려 괜히 더 밝게 웃어 보였다.
 
 
 "정답! 맛있어?"
 
 
 그런데 너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다. 꼭 뭐 잘못한 강아지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왠지 조금, 답지 않게 눈치를 슬슬 보는 얼굴. 나는 다시 엄습하는 불안감을 잠재우려 식탁 밑에 둔 양손을 꽉 쥐었다. 
 
 
 "사실 맛은 모르겠어, 색깔을 보니까 대충 블루베리 같아서, 그러니까 맛이 없는 건 아니고! 맛이 없다는 게 아니라, 맛을 잘 모르겠다고 해야 하나, 이상해. 뭔가 이상한 느낌이야. 그러니까 뭘 먹었는데도 입속에서 아무 맛도 안 느껴져서… 이상해. 느낌이 없어서 이상한 느낌, 이야."
 
 
 너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말이 평소보다 배로 길고 두서가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잔뜩 굳어버린 목소리로 병원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라면 뭐 이런 것 가지고 병원이야, 하고 받아칠 너도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달랐다. 그래, 좋은 일이 일어날 거란 예감, 그런 예감이 왜 들었는지 알 것 같았따. 나는 원래 감이 좋질 못하다.
 


 
 병원에 가서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요즘 이런, 원인 불명의 감각 상실로 병원을 찾는 사례가 꽤 많습니다. 신종 바이러스에 의한 것으로 일단은 추정하고 있는데, 백신이나 치료제는 아직 연구 단계에 있어 확실한 답변은 드리지 못할 것 같네요."
 " …확실한 답변을 줄 수 없다니요? 그럼 병원에서도 무슨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일반적인 증상이라면 대증치료라도 하며 경과를 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감각 상실이 흔한 증상은 아니니까요. 중추의 자극 수용체를 마비시키는 기전으로 추측되는데, 여타 신경계 질환과는 양상이 너무 달라서……."
 
 
 계속해서 뭔가 줄줄 설명이 이어졌지만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야, 이런 황당한 얘기를 들었는데 이해가 될 리 없잖아. 병원에서도 뭔가 해줄 수 없는 신종 희귀 질환이라니, 그런 건 정말 처음 들어보는데, 하다못해 이런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는 걸, 뭐 뉴스나 그런 데서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도는 와중에도 중심으로 모아드는 간절함은 단 하나였다.
 
 
 그러면 이제, 너는?
 묻기조차 두려웠으나 물어야만 했다. 
 
 
 "…치료법이 없다면, 자연적으로 나아질 가능성이라든지, 그런 것도, 전혀 없는… 겁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의료계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안전한 환경에서 환자분 케어에만 신경 써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안전한, 환경이요."
 "네. 아무래도 질환이 진행되면서 다수의 감각이 상실되니까요. 환자분 주변에 위험이 있어도 직접 감지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반 가정집보다는 요양 시설에서 전문가의 손에 맡기는 것을 추천…."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너와 떨어지라고, 이런 상황에서 너를 다른 데 보내버리라고.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그게 너를 위한 선택이라고 의사가 말하더라도, 그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나는 황급히 의사의 말을 툭 끊었다. 
 
 
 "환자 본인과 상의하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잠자코 생각에 잠긴 채 멍하니 앉아있는 너의 손을 붙잡자 조금 놀란다. 그래도 지금은 손을 잡으면 알 수 있으니까, 아직 그렇게까지 병이 진행된 게 아니니까,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나는 너의 손을 가볍게 잡아끌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일단 가자, 집에 가서 얘기 하자. 그 말에 네가 다행히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가구 코너에 씌우는 유아용 보호캡과 발이 보호되는 푹신한 실내용 슬리퍼를 샀다. 계속 멍한 네가 걱정되어 뭐 먹고 싶은 거 사갈까, 습관처럼 하던 말이 목끝까지 올라왔으나 턱 걸려 막혔다. 대신에 뭐 필요한 거 있으면 같이 사갈까? 하고 말을 바꿔 물으니 고개를 젓는다. 계산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중에도 너는 잠자코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면서도 물을 용기가 잘 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사랑하는 연인의 의지할 곳이 되어줘야 할 텐데, 나는 왜 이렇게 겁이 많고 나약해서.
 
 집에 돌아와 슬리퍼를 신겨주고 손을 씻으러 욕실에 가는 것까지 졸졸 따라가니 그제야 네가 엷게 웃었다. 안 그래도 오버가 심한 사람을 더 유난스럽게 만들었네.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에 이상하게 가슴이 쿵 떨어졌다. 난 유난 떠는 거 좋아, 이거 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알지? 억지로 너스레를 떨며 불안한 심정을 숨겼다.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조금 알 것 같았으니까. 
 
 역시나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너는 예상하던 말을 꺼냈다.
 
 
 "쭌한테 폐 끼치기 싫어. 어디 공기 좋은 데 가서 전문가 도움 받고 지낼게."
 "…무슨 소리야, 자기가 나한테 폐를 왜 끼쳐. 나는 좋아서 네 옆에 있는 건데."
 "면회 오면 되잖아. 자주 보러 오고, 그러면 되잖아."
 
 
 순간 조금 울컥하는 마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가뜩이나 충격을 받았을 네게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래도 나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내가 해 보고 싶어."
 "……."
 "내가 부족하면, 내가 잘 못 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자, 응? 그러면 안 될까?"
 
 
 간절하게 건네는 말에 네가 나를 살짝 돌아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쭌 힘들어 보이면 내가 짐 싸서 나갈 줄 알아. 알겠어?"
 "내가 왜 힘들어, 자기가 옆에 있는데."
 "주책은."
 
 
 그렇게 언제 갑자기 감각을 잃어버릴지 모르는 너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정보를 찾는 것이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니 환우 카페가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가입했다. 게시판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고충을 토로하는 곳, 간병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공유하는 곳, 국내외 연구 성과들을 퍼와 희망을 나누는 곳. 가장 앞선 게시판은 늘 붐볐고, 마지막 게시판은 글이 채 열 손가락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적었다. 공지사항엔 이런 말이 있었다. 고충 토로 게시판에 자살 관련 내용 게시를 금합니다. 그러나 틈날 때마다 새로고침을 해 보면 공지에 어긋난 글들이 종종 올라왔다.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부모로서 도저히 앞으로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생을 비관한 아내가 투신했습니다. 신혼의 기쁨을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게 미안해 따라가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유서에 더 고생시키기 전에 가니 보험금 잘 타서 어머니 잘 돌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규정 위반으로 삭제되었다는 오류 창으로 바뀌곤 했지만, 업로드가 되자마자 순식간에 올라가는 조회수가 알려주고 있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 절망적인 사연들을 모두가,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로서, 전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네게는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너는 내 걱정에 직장에 재택근무를 신청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일을 하며 지냈다. 나는 아예 6개월 휴직을 쓰고 항상 너의 곁을 지키며 밝은 척을 했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음식을 먹는 것을 싫어하게 된 너의 식사를 애써 챙겼다. 그 와중에 너는 두 번째 감각을 잃었다. 후각이었다.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먹고 마시는 일에서, 촉각을 제외한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도 없던 식욕이 더 떨어져 체중이 확 줄었다. 식사 시간이 지독하게 우울해졌다. 결국 네가 제대로 먹지 않으면 나도 먹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적게 먹어도 영양분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눈으로 보기라도 좋게 꾸며 내놓은 뒤에야 너의 식사량이 조금 늘었다. 그래도 여전히 턱없이 적었지만,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활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토록 염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쭌, 왜 어두운데 불을 안 켜고……."
 
 
 먼저 눈을 뜨고 일어나 네게 줄 물을 한 잔 따랐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예쁜 유리잔을 얼마 전에 산 예쁜 트레이에 올려 다시 방으로 향하는데, 문가에 서 있는 네가 어딘가 이상했다. 아침이 와 환한 방 안에서, 전등을 켜는 스위치를 더듬어 딸깍대는 모습이, 그러면서도 왜 방에 불이 안 켜지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네가 그토록 아끼던 유리잔이 깨졌다. 소리에 놀란 네가 내 쪽을 돌아보는데, 역시나 시선의 방향이 묘하게 어긋났다. 자기야, 가만히 있어. 다쳐. 떨리는 목소리로 일단 너를 멈춰세우고는, 신문지와 쓰레기봉투를 꺼내 큰 조각들을 치웠다. 청소기를 가져와 미세한 파편들까지 전부 정리한 뒤 나는 나도 모르게 흐른 눈물을 대충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잖아,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잖아.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했다. 내가 무너지면 너는, 사랑하는 내 연인은, 어쩌면 지금까지 봐왔던 그 수많은 절망의 미래로, 몇 십 몇 백 명의 다른 환자들처럼, 차라리 스스로 고통을 끝내기를 선택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것만큼은, 그것만큼은 안 되니까. 
 
 네게 다가가 조심스레 어깨를 부축해 침대에 앉혔다. 어깨를 끌어 안은 손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네가 피식 웃으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손을 왜 이렇게 떨어. 울긴 또 왜 울고."
 "…자기야."
 "그래도 소리 들리고 말도 나오고, 일 하는 데엔 문제없겠다. 귀찮은 건 전부 쭌 시키고."
 "……."
 "아니면, 이제 진짜 공기 좋은 데 가서 좀 쉴까? 쭌도 많이 고생했으니까, 둘 다 좀 쉬어도…."
 "그런 소리 하지 말랬지. 나는 할 수 있는 데까진 한다고."
 
 
 그 말에 네가 고개를 돌렸다. 분명 내가 보이지 않을 텐데,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한다. 
 
 
 "할 만큼 했어, 김남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나는 절대 너를… 포기할 수 없는데. 네가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을 넘어 듣지 못하고 아예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너를, 너만큼은, 절대 포기하고 놓아버릴 수가 없는데, 왜냐면 너를 놓아버리면, 내가 너를 놓아버리면, 어쩌면 너도 너 자신을…….
 
 네게 슬리퍼를 신긴 뒤 씻는 것을 도와주고, 일단 소파에 앉아만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 미리 가구 모서리 같은 곳은 보호를 해 두었고, 뾰족한 도구들도 찬장 높은 곳 구석에 올려놓고 나왔지만, 아무래도 뭔가 더 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시각을 잃은 환자 보호자들의 조언을 구하러 카페에 접속하려는데,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 표시 불가에, 답장도 되지 않는 메시지. 그러나 내용이 너무나도 이상해서, 장난이라면 이렇게 악질적일 수가 없고, 진실이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가.
 
 
 치료제가 있습니다.
 
 
 짧은 문장 아래 주소 하나가 덧붙여져 있었다. 먼 곳이 아니었다. 그것마저도 이상했다. 마치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아는 사람이 보낸 것만 같은. 
 
 믿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보는 것도 지금은 사치였다. 나는 태연한 척 집에 돌아가 마트랑 약국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차 키를 들고 나왔다. 급한 마음에 과속에 신호 위반까지 했지만 이성적인 생각이 되지 않았다.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네가 나을 수 있다. 그 실낱같은 가능성만이 머릿속을 쾅쾅 울렸다. 
 
 다다른 곳은 한적한 공터였다. 이런 데에 대체 뭐가 있다는 거지. 역시 나쁜 의도의 장난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주차되어 있는 다른 차가 눈에 띄었다. 경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다가가니 덜컥, 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아주 평범한 인상의, 특징이랄 것 하나 없는 흔한 생김새였다. 이런 사람에게 치료제가 있다고? 무슨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역시나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남자가 히죽, 기분 나쁘게 웃었다. 
 
 
 "김남준 씨, 빨리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메시지 보낸 사람입니다. 김지니 씨 간병하고 계시죠?"
 "…메시지, 사실입니까?"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은 채 묻고 싶었던 것만을 물었다. 남자는 허허, 재밌다는 듯이 웃더니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제 차에서 얘기하실까요? 박사님과 직접 대화하시죠."
 "박사라니?"
 "아, 이 바이러스를 창시한 분입니다. 엄청난 분이시죠."
 
 
 이딴 말도 안 되는 걸 만든 사람이 엄청나다고?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길게 재고 따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병을 만든 사람이라면 치료하는 법을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이게 너를 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낯선 사람의 차에 타는 건 찝찝하지만, 여차하면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가 맞서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남자를 주시하며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당장 시동을 걸 거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겉으로 볼 때엔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남자의 차는 무슨 영화에나 나올 것처럼 내부에 여러 버튼과 화면들을 단 개조 차량이었다. 그는 버튼을 몇 개 누르더니 중앙의 큰 화면에 말을 걸었다. 
 
 
 "박사님, 김남준 씨 오셨습니다. 직접 말씀하시죠."
 
 
 그러자 화면에는 사람 얼굴 대신 별 웃기지도 않는 로고가 떴다. 아무래도 본인을 직접 드러내기는 싫었나 보지. 심지어는 목소리도 변조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웃음기 섞인 낮은 변조음이 차 안을 울렸다. 
 
 
 "치료제가 있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 아, 네. 아무래도 급하시겠죠. 그래요, 인사치레고 소개고 다 무슨 소용입니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이런 미친 짓을 시작한 놈과 대화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지만, 말하는 꼴이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서로 하하호호 웃으며 인사 주고받고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은지. 아주 명함을 교환하자고 하지 그래.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최대한 차분히 말을 꺼냈다. 
 
 
 "치료의 대가로 원하는 게 뭡니까. 아니, 뭐든 간에, 오늘 안에 마련해올테니, 치료부터…….
 - 뭐, 마련까지 해오실 건 없고, 사실 지금 당장도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걸 딱 들고 오셨거든요.
 "…그게 뭡니까."
 - 남준 씨 목숨이요.
 
 
 뭔 미친 소리를……. 그러나 내가 황당해하기도 전에 박사라는 사람이 말을 이었다. 
 
 
 - 치료제의 효과는 반드시 보장합니다. 지니 씨에게 따로 청구되는 것도 없고요. 그저 남준 씨가 결단을 내려주시면 되는 문제죠. 저는 바이러스나 질병보다도 인간의 감정이라고 해야 하나, 뭐, 숭고함과 진실됨에 좀 더 관심이 있는 편이라서요. 사실은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려고 하는 중이죠. 
 "그게 무슨……."
 -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멀쩡한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말로는 자기가 대신 아프고 싶다, 하면서 정작 제가 기회를 줬을 때 순순히 수락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치료의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환자에게 직접 밝히지는 않는 주의라서요. 환자 입장에서는 간병하던 사람이 갑자기 없어져서 당황스럽긴 하겠지만, 그래도 병이 나았으니 기쁘기도 하겠죠? 목숨 버린 쪽만 억울하지.
 "……."
 - 뭐, 생각할 시간은 드리겠지만, 어차피 남준 씨도 비슷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시겠어요? 남의 삶보다는 결국 자기 목숨이 더 중요하죠.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당연한 본능이에요. 인간도 결국 동물이니까요. 다른 종보다 더 숭고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다시 연락드릴 때 한 번 더 뵙죠. 결정은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물론 그때는 또 어떤 감각이 없어져 있을지 모르지만.
 
 
 미친 새끼.
 대화할 가치도 없었다. 어떻게 이딴 개소리를 늘어놓지. 정말 치료제를 가지고 있는 게 맞긴 한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꺼진 화면을 노려보는 내 팔을 곁에 있던 남자가 살살 두드렸다.
 
 
 "김남준 씨, 그럼 천천히 생각하지고, 다음 주 정도에 다시 연락드리죠. 박사님 말씀대로 바로 결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김지니 씨에게는 알리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희는 전부,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복잡한 심정으로 남자의 차에서 내려 다시 내 차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내내,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너의 환히 웃는 얼굴이었다. 못 본 지 오래되었지, 그렇게 예쁘게 웃는 모습은.
 

 내가 사라져 네가 다시 그렇게 웃을 수 있다면, 내가 보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네가 다시 건강해져서, 예전처럼 좋아하는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다시 건강해진 네 옆에 내가 있고 싶다는 마음은 그러면, 아주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지 않을까.

 몇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에 복잡한 생각이 잔뜩 얽혔다. 무겁게 발목을 붙잡는 고민들 사이로 문득 울음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나약한데, 네가 없으면 이렇게 나약한데, 왜 이런 나에게, 이런 선택을 하게 하는 걸까, 대체 왜.

 어깨에 빗방울이 토독토독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을 양 손으로 감쌌다.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빗방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피하는 것만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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